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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컬럼

NO1작성일 : 2015-11-11 오후 09:56
제목
49. 처음마음(初心)으로 돌아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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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마음(初心)으로 돌아가서
- 안식년에 들면서 -

입산출가(入山出家)한 지 어언 27년째이다. 꼭 26년 5개월이 되었다. 불교(佛敎)의 핵심내용인 연기법(緣起法)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법문을 접했을 때 나는 삶의 구조적 비밀을 다 알아버린 듯 머릿속이 개운했고, 모든 삶의 대책론의 마스터키를 손에 쥔 듯 뱃속이 두둑했다. 그리고 심소조(心所造)의 원리를 명상하다가 일체 대상을 자기 습(習)대로 걸러서 받아들이는 나의 육근(六根 : 眼, 耳, 鼻, 舌, 身, 意)의 비실체성(非實體性)을 직시하면서 마음이 개체아(個體我)의 한계를 벗어나 허공으로 열리는 것을 느꼈다. 숨쉬는 것도 잊은 채 잠시 광명천지의 허공심에 머물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어디서 터져 나오는 울음인지 한참동안  오열을 토했다. 가슴이 시원하고 호연(浩然)한 마음이 되었다. 이것이 20대 초에 온 나의 첫 종교적 체험이었다. 그 이후 나는 세상명리에 대한 염사(念思)가 거의 사라졌다. 지향할 바의 확실한 방향을 얻은 것이다. 그 체험의 심도를 더해갈 일만 있을 뿐이라고 여기며 수월하게 스스로 삭발을 하였다. 그러한 큰 깨달음은 수도생활을 하면서 몇 차례 더 오기도 하였지만 깨달음이 더 순숙되어 가야할 터인데 조금만 게을러도 자칫 여습(餘習)이 몰아와서 피아(彼我)ㆍ시비(是非)에 휩싸이게 된다.

전문수행자의 길을 가기 위한 준비과정인 행자(行者) 시절에는 누구나 다 겪듯 어려움이 더러 있다. 절집에서만 있는 특유의 생활 문화도 익혀가야 했고, 세간에서의 한 밤중인 새벽 2시 40분쯤에는 일어나야 하는 일도 곤혹스러웠고, 행자신분에 어찌 일신의 안위를 살피는 마음을 허용하랴 싶어서 고무장갑도 안 끼고 설거지ㆍ일반청소ㆍ화장실청소 등을 하면서 손을 호호 불던 일도 치렀고, 법당 예불 모시는 예법도 터득해야 했고, 서투른 부엌일도 익혀가야 했고, 일체 예식에 필요한 어려운 한자말의 염불까지 외워야 하는, 그리고 층층시하(層層侍下)의 심리적 시집살이 등 신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짱짱하게 고단한 나날이었다. 그 중에서 내 개인적으로 가장 힘겹게 치룬 과제는 행자도반과의 관계였다. 대중들 가운데 가장 가까이서 접하고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동료로서, 또한 서로에 대하여 자신을 가장 많이 들키면서 교류하는 사이인 것이다. 아울러 모두 서투른 초행의 사람들이다 보니 아무리 전문수행자의 길을 나섰다 하더라도 아직은 미성숙한지라 서로의 눈에 설기 마련이다. 오히려 어르신들의 눈에 들기는 쉬었다. 삼가고 또 삼가는 초심의 시절이니 어르신들의 원하시는 바를 얼른 알아차려서 민첩하게 행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몇 달 먼저 들어오신 그 행자님의 시집살이가 어찌나 매콤했던지 지금 생각해도 회심의 미소가 지어진다. 행자살이 동안에  그 이전의 평온했던 마음과 열려있던 의식이 다소 침해되어지기는 했지만 여러 모로 더 단단해졌고, 평생 그만큼 무조건 죽어지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하여 행자살이는 물론 그 자체로서 수도이기도 하려니와. 평생의 수도생활의 밑거름을 장만하는 계기가 되었다.

행자시절을 돌이켜보면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곱고 낮은 마음으로 살았던 한 동안의 세월이었던 것 같다. 내 생애에서 가장 보배로웠던 나날로 꼽힌다. 그야말로 무조건, 온전히, 빠짐없이 수용하겠다는 자세로 살았다. 모든 경계(境界)가 다 스승이라고 철저히 섬기는 마음이었다. 일체가 다 부처님의 시험이라 여기면서 한 코스도 추락되지 않기 위하여 최선으로 깨어있고자 했고, 모든 경계가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로 여겨지며 그저 감사했다. 예불 시간에 몇 초라도 늦는 것을 큰일 나는 것으로 알고 지키며, 한 젓가락의 음식도 어찌 그리 감사하였으며, 볼을 에는 듯한 칼바람의 새벽 도량석도 선민(選民) 정신의 자부심으로 환희롭던 기억, 섬세한 번뇌 한 자락도 화들짝 놀래며 다스리던 그 지극정성의 일상들.....  가장 낮은 마음이면서도 그러한 자신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게 보이는지 가장 거룩한 정체성을 가졌었다. 그 바쁜 와중에서도 틈을 쪼개서 쓴 일기장을 나중에 읽어보고 기특하여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수계(受戒) 절차를 거쳐 정식 승려가 되었고, 다사하고 다채로운 세월이 흘러갔다. 총기와 감수성이 있는 편이어서 정신문화의 가치체계들을 대체로 빨리 습득하고 수도문화권의 생활이 마치 체질인 듯 잘 적응하였고, 게다가 사람과 잘 어울리는 다소의 재주들도 있는데다가, 또 일찍이 동사섭 문화와의 인연으로 오랜 세월 동사섭 수련을 안내해 오면서 소위 <선생님노릇>을 많이도 해 왔다. 게다가 승려라는 형색 자체가 교도들께는 이미 영적 스승의 상징적 존재이기에 상당한 대접이 주어지는 연고로, 또 자연스러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스승노릇>도 되어졌다. 물론 그런 가운데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고 정성스럽게 더욱 다져갈려고 애써오기도 했고, 많은 일들도 일구어 왔으며, 세상에 어떤 도움을 드리기도 하였다. 나를 은혜롭게 여기는 팬들도 많고,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벗들도 많고, 나를 스승으로 여기는 제자들도 많아졌다. 처음 깨달음 이후 가졌던 마음의 평화로움이 깊어지기도 했고, 법리(法理)에 대한 명철함이 더해진 것도 사실이다. 호연지기가 더 커지고, 마음속에 별 번뇌라 할 것이 없는 맑은 마음도 그 순도를 더해 가고 있다. 언제라도 죽을 수 있을 듯 생명에 대한 애착도 없고, 생(生)과 사(死)가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한 흐름이라는 것을 몸[身]이 아는 데서 오는 자유감도 있다.

그런데 어떤 그리움이 있다. 행자시절의 곱기만 하던 그 마음이다. 법문 한 말씀 한 말씀이 주옥처럼, 금언(金言)처럼 들리어 공손히 합장하며 영접하던 나직한 그 마음이다. 그저 인정받고 보호받기만 하던 묵은 인연들을 떠나 온통 낯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죽은 듯 적응해가던 그 고독한 마음이다. 손짓 하나 발짓 하나에도 진지함을 담은 그 정성된 마음이다. 선생님과 어른을 오래 하면서 잃어가고 있는, 낯익은 사람들 속에서 묻혀가는, 얕은 자유와 여유 속에서 둔감해져 가는 초심의 마음이 지긋이 그립다.

하던 일체의 일들을 멈추고 쉬기로 한다. 만나오던 많은 사람들을 저만치의 거리에 두고 혼자이기로 한다. 지인(至人)의 길이 아직 멀기만 한데 느슨함을 너무 많이 허용했다. 다시, 초심 때의 그 시퍼런 각오를 다진다.

* 그동안 꾸려왔던 많은 활동들을 접고 잠시 안식년에 듭니다. 인격 완성의 정진에 더욱 힘쓰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전화 못 받아서, 초대해 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더 맑고 밝고 평온한 마음으로 다시 뵙겠습니다. (명상칼럼의 글은 쓰게 될 것입니다.)

2005년 5월 1일
명상의 집 ; 대화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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