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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컬럼

NO1작성일 : 2015-11-11 오후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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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검불 없는 삶의 고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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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불 없는 삶의 고결함

마음가운데에 호리의 검불도 없는 허허로운 삶을 그려보며 늘 그립습니다. 그 그리움에는 또한 늘 은근한 눈물이 담겨있습니다. 애처로운 노력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만으로도 든든한 자긍심과, 그리고 작은 노력에도 반드시 선명한 넉넉함이 보람으로 따르는 감사함에서입니다. 하여 더러 외롭고 힘겹고 아프더라도 일상 가운데서 애써 모지락스럽게 지향해 봅니다. 불혹(不惑)의 나이에도 혹함을 여의지 못하여 마음이 치우친 연후에야 다스리곤 하며 겨우 부끄러움을 다잡아 왔던 바, 바야흐로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이르러서도 아직 천명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지라 그저 짧은 소견으로서의 소박한 소망을 천명으로 여기며 하루하루의 명(命)을 갉아가고 있습니다. 그 소망이 나의 마지막 명줄인 양 소중히 여기며, 제 삶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점검하는 잣대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검불 없는 삶’입니다.

검불이라 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얼씬거리는 탐진치(貪嗔痴)의 번뇌를 말합니다. 그것을 제 스승께서 ‘검불’이라 부르심이 하도 좋아서 따라서 쓰고 있습니다. 탐진치를 검불이라 칭하니 번뇌가 일상의 생활공간 속에서 편안하게 접하는 먼지처럼 여겨지어 한층 수월하게   다가가게 되고, 그를 다스림에도 한결 따습게 행해지는 듯하여 그 이름이 참 좋습니다. 또 검불이라 이름을 지어놓으니 아주 사뿐하게 나부끼는 섬세한 번뇌조차도 부담감 없이 면밀하게 다루어지는 듯하여 좋습니다. 호리의 검불이 없는 의식상태를 상상해 봅니다. 얼마나 고결하게 여겨지는지........! 청명하기 그지없는 가을하늘을, 한 점 구름도 없이 무궁히 열린 가을하늘을 올려다 볼 때의 한없이 맑고 평화롭던 마음과 대비해봅니다. 이러한 상상만으로도 맘껏 좋아서 고귀한 연인을 흠모하듯 소망이 사무칩니다.

마음속에 검불이 없어 주어지는 모든 것들이 그저 은혜로 여겨지며 가난과 실패 속에서조차 창조에너지를 만들어가는 한 가족의 고운 모습을 나눕니다. 읍 소재지에서 약 시간 반이나 가야하고 트럭으로나 겨우 올라갈 수 있는 비좁은 임로(林路)를 따라 그 끝닿는 곳에 있는 흙집에서 그들은 살고 있답니다. 그곳을 아직 직접 답사를 하지는 못하였지만,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그들과는 벌써 몇 차례 만나오고 있고 만난 세월은 이태나 됩니다. 제가 칡즙 단식의 탁월한 효과를 듣고 자신과 주변인들에게 소개하여 더러 하고 있는 중입니다. 칙의 원액을 그 분들께 공급받고 있는데 그들 부부는 산에 올라가서 괭이와 삽으로 칡을 캐며, 손수 정성껏 즙을 내어 직접 트럭에 싣고 오십니다. 오늘도 그분들이 칡즙을 가지고 다녀가셨습니다. 부부의 모습은 늘상 아무런 꾸밈이 없이 수수한 산골 농부차림들이며, 다섯 살 된 꼬맹이 도령까지도 진흙으로 잔뜩 물들어 있는 흰 고무신을 신고 옵니다. 부인께서는 겨우 30대 중반을 갓 넘으시고 남편께서도 아직 40대 초반이신데 그들은 우리가 어린 시절에 시골어른들께서 입으시던 그런 형태의 소박한 한복을 입으시고,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옥양목 천의 두건을 쓰고 있습니다. 신발은 두 분 다 고무신을 착용하시었고 옷맵시나 말씀의 억양, 얼굴, 미소 등에서 풍기는 향기는 그분들을 뵙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순화가 되는 듯 맑아지게 합니다. 꼬맹이 도령의 이름은 구륜(九輪)이라 하는데 투명한 유리알 같은 낯빛을 하고 있고, 수줍음이 많아서 적극적인 인사도 잘 못하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정감이 가며 눈길을 끄는 독특한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그들 가족의 일상을 듣고 있노라면 가슴에 가득 평화로움이 찹니다. 그곳이 마치 무릉도원이 아닌가 하는 부러움과 동경을 갖게 합니다. 남의 땅을 좀 빌려서 전혀 농약을 쓰지 않고 순수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답니다. 남편은 산(山)으로 들어가서 약초 등을 캐며  산사람이 된지는 어언 20년이 넘었고, 농사를 짓기로 하여 그 골짝으로 온 처음 수년 동안은 땅을 순화시키고 유기농법으로 길들이는데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몇 해 동안은 해마다 몇 백 만 원 씩의 부족한 생활고를 메우기 위하여 농사철 아닌 때에 읍으로 가서 공사판의 노동을 하였다 합니다. 아직도 부엌에서는 산쥐들과 함께 살고 있으며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지어먹고 있고, 읍내 5일 장에 나가는 일은 딱히 구입할 것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장 구경을 하기 위한 즐거움으로 한번씩 나들이를 간다 할 정도로 식생활의 모든 것들을 자급자족하신다 합니다. 이제 아내의 고생을 좀 덜어드리기 위하여 싱크대를 넣어주고 싶다고 하는데 그 고운 원(願)이 심금을 울렸습니다.

구륜이의 엄마께서는 당신 고향의 여고를 졸업하시고 서울로 가서  십 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다가 집안 어른들의 결혼권유의 성화에 못 이겨 혼처를 구하던 중, 어린 시절 읍으로 8킬로미터나 걸어 다니며 학교를 다녔고 농사를 짓는 농군의 딸이었는데 그 따사로운 농촌생활이 늘 그리워 농사짓는 분께 시집을 가고 싶어 인터넷으로 이리저리 알아보아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흙을 손에 만지며 농작물을 가꾸고, 하루 종일 햇살을 안고 묵묵히 살아가는 나날이 너무도 만족스럽고 평화롭다고 하시는 구륜이 엄마의 맑은 마음의 소리는 천녀(天女) 같은 환상을 갖게 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그저 미소가 지어지게 합니다. 우리가 차를 들며 이런저런 마음나누기를 하고 있는 동안 개구장이 같은 구륜이가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마당으로 마구 달려가며 뛰어노는데, 그 엄마 금방이라도 달려가서 이 오염된 비를 맞지 못하도록 말릴 법한 상황이지만 망연히 바라보며 아이의 즐거움을 함께하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보기에 좋던지 배워지고 존경되는 마음으로 훈훈했습니다. 아이와 어미와 애비 모두 그냥 자연의 일부였습니다. 거부하고 거절하며 사릴 것이 없이 단지 모든 것과 함께 존재하고 있는 듯 시비 없고 여유 있어 보이는 그 모습이, 참으로 참으로 마음을 평온하게 하였습니다. 일상 속에서 검불 없는 삶의 이상적 모형 같은 구륜이네 가족의 모습, 닮고 싶고 권하고 싶은 우리들의 희망입니다. 오늘 몇 시간의 만남과 나눔으로 몇 겁의 업장이 절로 녹는 듯한 은혜를 느끼며, 이분들이 제게 오신 오늘의 부처요 보살이시라는 믿음으로 가슴이 그득한 하루였습니다. 설령 이 모든 묘사가 오직 나의 주관적인 염체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으로 제가 깊게 기쁘고 제 안에서 그들이 높게 모셔지니 좋습니다. 그리고 제게 고요한 경책이 되어주니 더욱 좋습니다.

마음속 구석구석의 검불을 새삼 엄숙하게 점검해 보는 하루였습니다. 검불 없는 삶, 호리의 검불도 없는 삶을 흠모하며 오늘도 묵묵히 애써 가겠습니다.
종일 가지런히 곱게 내리는 빗줄기가 마음을 차분하게 합니다. 이 세상 모두의 평화로움을 다시금 깊게 빌며 하루를 마감합니다.

2006년 6월 중순
명상의 집; 대화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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