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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컬럼

NO1작성일 : 2015-11-11 오후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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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삶 : 삶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의 첫 단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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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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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의 첫 단추 -

삶이란 무엇인가? 살아 숨쉬고, 생각하고 느끼며, 목숨 다할 때까지 무엇인가를 끝없이 지향해 가는 이 삶! 각각의 사람들이 갖가지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 모두의 삶의 목적은 행복이라는 점에 있어서 공통적일 것이다. 세상 모두의 삶이 진정 행복하시길 진심으로 빌면서 이 글을 쓴다.

설령 삶이 무엇인지를 개념적으로 선명히 설명해 내지는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 정의를 논함에 있어서 서로 통하는 느낌이 있다. 그저 가슴 찡한 감동으로 통하는 정서가 있다. 삶이란 신(神)이 내린 선물이라 해도 좋다, 자신(自身)이 선택한 필수 과제라 해도 좋다, 우리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멍에라 해도 좋다.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삶이란 우리에게 절대적인 가치로서의 무엇이다. 이 세상의 어떠한 종교적 원리나 철학적 논지라도 이 <삶>을 제외한 것이라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이러한 삶을 보다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요모조모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서는 삶에 대한 태도 정립일 것이다. 나름의 몇 가지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자칫 익숙해져 있는 습관적 애매함으로 세월을 흘러 보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삶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로서의 그 첫째는 <삶을 소중히 여김>이지 않을까 하는 신념을 권장해 본다. 삶의 소중성에 대한 각성 말이다. 삶이란, 사람의 삶이란 그 누구의 그 어떤 삶이라한들 소중하다. 논리 전개를 펼쳐 가노라면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의 삶이 다 소중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선 사람의 삶을 논해보자는 것이다. 남녀노소, 빈부, 지위에 상관없이 자신의 삶을 참으로 귀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내 내담자들의 상당수가 자신의 삶에 대한 비하감(卑下感)을 가지고 있다. 놀랍게도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하여 <애매한 생각>으로 있든지 혹은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지 않음> 속에 있든지 하고, 그 결과 다양한 심적 고통으로 시달리고 있음을 본다.

남보다 가진 것이 좀 부족하다 하여, 남보다 학벌이 좀 낮다 하여, 남보다 사회적 지위가 좀 못 미친다 하여, 남보다 얼굴이 좀 못 생겼다 하여, 남보다 능력이 좀 떨어진다 하여 스스로가 먼저 자신의 삶을 비하하여 고개를 떨구며 어깨에 힘이 빠져 있지는 않는 지 돌아볼 일이다. 또는 삶에 대한 별 생각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업이 끌어당기는 대로 이끌려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어둑어둑한 새벽 도심의 골목길에서 음식물 썩은 냄새 물씬한 공기를 삼키며 쓰레기를 치우고 있는 미화원의 치열하고 부지런한 하루의 시작 속에서, 미어터지도록 가득 태운 전철 속 북적되는 출퇴근길의 사람 냄새 속에서, 저자 모퉁이 난전에서 풋고추 몇 움큼과 상추 몇 단, 그리고 직접 껍질 벗긴 토란 몇 그릇 내어 놓고 한 푼이라도 절약하기 위해 주어다 모은 듯 꼬깃꼬깃 허름한 검정 봉지에 담아서 팔고 있는 할머니 노점상의 꾸부린 허리와 시린 손끝에서 읽어지는 실감나는 애틋한 삶, 하루 종일 상자 같은 빌딩 속에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빚어가는 회사원들의 일과 속에서, 종일 남의 자식들을 맡아서 개가 그 똥도 안 주워 먹을 만치 속 썩어 가며 아이들과 함께해 주시는 교사들의 목청 높은 언성들 속에서, 이제는 사래 긴 논밭을 땀 흘리며 갈고 있는 황소 구경하기도 드문 시골이 되어버렸지만 아직도 시골 들녘을 지날 때면 느껴져 오는 천심(天心)의 농심(農心), 그 땀 냄새 속에서 더듬어지는 삶, 삶, 삶의 파노라마! 이러히 절박하고 애잔하며, 지극하게 아름다운 삶들을 어찌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어찌 기도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 마을에 홀로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올해 연세가 팔십 다섯이시다. 슬하에 자식이 하나도 없고 일찍이 혼자가 되시어 정부에서 배려하는 무의탁 독거노인 혜택을 받으며 살아가신다. 소유하고 있는 땅이라고는 겨우 작은 오두막집 하나와 백 여 평방미터의 미나리 밭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 미나리 밭에서 기른 미나리는 읍내 장에다 내어 파신다. 자주 우리 명상의 집에도 갖다 주신다. 그것이 그 할머니의 한 낙(樂)인 듯싶다. 꼬부라진 허리는 90도 각도는 되는 것 같다. 귀도 어두워진 지 오래다. 보청기를 끼면 귀가 울리고 머리가 아프다 하시며 보청 기구는 빼 놓고 사시는 편이다. 당신이 잘 들리지 않으니 늘 목청이 높다. 우리도 소리 높여 말을 해야 겨우 들으실 수 있다. 그러하자 하니 마을 주민들과의 사교가 원활할 리가 없다. 게다가 외롭고 소외감이 느껴져서인지 오해도 잘 하신다. 마을 주민들에 대하여 서운한 점들이 많으시다. 그럴 때면 나에게 와서 더러더러 하소연하신다. 들어보면 미나리 할머니께서 과민하게 여기시는 것들도 많다. 그러나 잘 들어드리고 차도 대접하며 따숩게 대해 드리니 딸처럼 의지하고 드나드신다. 아무 딸린 식구들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몸을 잠시도 가만 두지 않으시고 부지런하게 오두막집 주변의 거친 땅들을 일구어 콩이랑 팥이랑 열무랑 상치 등을 가꾸신다. 조금씩 돈이 될 만한 것들이 수확되면 읍내 장에 가서 돈이랑 바꾸어 저축을 하곤 하신다. 물려줄 자식도 없건만 그 꼬부라진 허리와 아픈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도 정말 열심히 살아가신다. 17년 전 이곳에 처음 이주해 와서는 할머니를 보면 늘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나왔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몸이 그다지 성치 않으셨다. 그러나 오랜 세월 가까이서 할머니를 지켜보지만, 다만 쓸쓸하고 버겁기는 하나 할머니께서는 당신의 삶이 지루하거나 귀찮거나 공연한 짐으로 여기시지는 않은 것 같았다. 현재에도 미래에도 아무 낙이 없을 듯 보이는 한 노인이, 너무도 악 조건의 건강 상태임에도, 매 순간 지독하게 열심히 정성껏 살면서 차근차근 미래에 대한 준비도 해 가시는 모습에서 나는 할머니에 대한 나의 연민과 아픔과 눈물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나의 그릇된 해석에서 온 오만이 아닐까 하고 반성했다. 할머니의 새까만 얼굴빛과 깊은 주름, 터진 손등과 꼬부라진 허리, 그리고 거칠게 높은 목청 등 어느 것 하나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나에게 <삶>에 대하여, <사람의 삶>에 대하여 한층 성숙된 관점으로 바라보게 한 모습들이었다. 그 할머니가 언젠가부터 오셔서는 집안의 물건들이 한 개 씩 없어진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가져간다고 하신다. 다른 분들께 가만히 여쭈어 보니 아닌 것 같았다. 할머니 왜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되었을까 궁금해 하고 의아해 하면서, 그냥 당신의 속 소리를 들어드리는 것으로 한 몫을 한다고 여기며 세월이 갔다. 지난 겨울철 초입에 할머니를 인근 도시의 시설에 모셨다고 마을 이장님께 전해 들었다. 치매가 오셔서 다른 방도가 없었다 한다. 그때서야 아하 할머니께서 자꾸 무엇을 잃었다고,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고 하셨던 것이 매병의 시작이었던 모양이구나 하고 가슴이 시려왔다. 바쁜 수련 철이 되어 아직 찾아뵙지를 못하고 겨울을 났다. 내일엔 이장님께 상세히 여쭈어서 할머니를 찾아뵈올 것을 마음먹는다. 나를 알아보실지 모르실지는 알 수 없으나 한번쯤은 가서 뵈어야 도리일 것 같고, 또 그리 해 드리고 싶다. 할머니 가슴 속에, 내 가슴 속에 서로의 존재가 의미 있게 자리하고 있는 인연인 듯해서이다. 따사로이 손을 잡고 가슴을 쓸어드리고 싶어서이다. 뉘라서 이 분의 삶을 무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며, 뉘라서 이 삶을 초라하다 할 수 있겠는가? 그냥 <삶>이라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뇌리와 가슴을 후비며 감동을 주는 이 삶을.........! 미나리 할머니의 한 생을 떠올리니 세상 모두의 삶에 대하여 다시 한번 마음 머물게 한다, 눈물이 맺힌다. 세상 모두가 자신의 삶에 대해 지극한 맘으로 귀의하며 소중하게 여길 수 있기를 빈다, 참으로 빈다.

불교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 불법(佛法) 만나기기가 얼마나 어려우며 귀한 일인가에 대한 깨우침을 주기 위해 맹귀우목(盲龜遇木)이라는 설화를 통하여 비유적으로 안내한다. 백 년에 한번 씩 물위로 올라오는 눈 먼 거북이가 백 년 만에 물위로 올라왔을 때에, 구멍이 하나 겨우 뚫린 나무판자 하나가 망망대해에 떠다니고 있는 것을 만나서 그 구멍으로 고개를 내밀고 의지하여 숨을 쉰다는 것에 비유한 이야기이다. 우리 모두의 순간순간의 삶은, 바로 그 눈 먼 거북이가 백 년 만에 물위의 세상으로 올라와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난 것과 같은 기회일 수 있다. 또 성경에서는 말씀하신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살아있음 자체로서, 살아서 삶을 영위해 가는 것만으로서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일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목숨을 넘어서는 초월론을 논하여도 실감이 날 것이며, 그 귀한 목숨과 삶에의 집착을 놓게 하는 무아론(無我論)도 절실해 질 것이 틀림없다. 귀하고 소중한 삶이기에 지고(至高)한 행복의 경지에까지 안내해 가고 싶을 것은 당연하다.

그 어떤 모습의 삶일지라도 자신의 삶을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지 말고, 욕심에 이끌려 스스로 비하하지 말고, 그 삶이 고통으로 범벅되어 죽을 지경일지라도 스스로 존귀한 마음일 것이며, 경건히 받들며 살아갈 수 있다면!

동사섭 수련회의 첫 주제 강의 시간에 첫 설문을 던진다. “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진리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라고. <삶!>이라고 답하도록 유도한다. 삶이라고!

 
2008년 2월 18일

명상의 집 : 대화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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