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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컬럼

NO1작성일 : 2015-11-11 오후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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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아름다운 유산(遺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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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유산(遺産)

- 무엇을 유산으로 남길까? -

 

사람들은 대체로 죽어갈 때에 평생 모아 온 모든 재산들을 자손들에게 남기거나 사회에 회향(回向)하고 간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남겨 놓은 재산 혹은 앞 세대가 물려준 문화 등을 유산이라고 한다. 개인이 되었건 한 세대가 되었건 남겨진 재산의 의미는 매우 큰 것 같다. 자신이 괘념을 하든지 안 하든지 그 유산이 후손들에게 음으로 양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훗날 생을 마감하면서 자손들에게 혹은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남기게 될 것인가에 대해 한번쯤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것에 집착할 일은 아니나 사람이 죽은 후에 남겨지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살아온 자취의 총화라고 보아도 될 것이기에 말이다.

무엇을 유산으로 남길까를 자신의 한 주제로 삼아본다고 할 때에 우선 핵심의 몇 가지를 들어본다면 자손들의 보다 안전한 생활을 위한 경제력, 가업(家業)으로 삼던 일, 심적 힘이 되어줄 만한 명예, 정신적 지주가 되어줄 철학[가치관] 등이다. 어쩌면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도 남겨지는 것들이다. 그 사람이 살다가 간 흔적으로이다. ‘무엇을 유산으로 남길까?’는 ‘무엇이 유산으로 남겨질까?’와 같다.

 

주영이 어머니 정 여사님은 50대 초반의 무용가로서 대학에서 한국무용을 지도하는 교수이며 중요무형문화재 살풀이 춤 예능 보유자 이매방 선생님의 살풀이 춤 전수자이기도 하다. 5살 때부터 춤을 추기 시작하여 대학 졸업할 때까지 전국의 크고 작은 춤 대회에서 갖가지의 상을 휩쓸 정도로 춤에 대한 뛰어난 감각과 재주를 지닌 분으로서 또한 춤을 너무도 좋아하는 영락없는 춤꾼이다. 항시 맑은 웃음을 담고 있는 고운 얼굴에 자그마한 체구, 선량한 심성, 따뜻하고 고요한 말씨, 일상생활 속에서의 모든 행동거지에서 느껴지는 절도 있는 자연스러움 등 곱지 않은 구석 하나 없는 듯한 춤의 요정(妖精) 마님이시다.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마치 춤사위 같다. 이러한 정 여사님을 나는 소중한 인연으로 여기며 각별한 관심으로 지켜보며 이웃한다. 그리고 가끔씩 그 분과 함께 시간을 가지면서 인생에 대하여, 참삶에 대하여 많이 배운다. 자식으로서,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한 시민으로서 좋은 본이 되는 분이시다.

그렇게 춤에 미친 듯이 춤을 좋아하던 정 여사님은 E여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조교로 발탁되어 한 학기 정도 지낸 어느 때부터, 결혼을 하겠다는 의중을 밝힌 것도 아닌데 여기저기에서 중매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다. 얼굴 예쁘고 마음씨도 곱고, 학벌도 이름 있고 집안 평판도 매우 좋은지라 지연들께서 욕심을 내셨던 것 같다.

그리하여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었고, 결혼 후에는 그토록 찬란하게 빛나는 무용수로서의 날개를 접고 20여 년 춤에 바쳐온 열정을 고스란히 가족들과 함께하는 데에 바쳐왔다고 한다. 그 자신에게 있어서 무용이 너무도 소중한 가치이지만, 일단 결혼을 하게 된 바에는 가족들의 행복을 지키는 것이 더 소중한 일로 여겨져 뒤도 안 돌아보고 가정에 파묻혔다 한다. 춤을 다시 추기 시작하게 될 때까지의 20여 년 동안을..............  정 여사님의 살아온 이야기들은 마치 전설 속 주인공의 일화들처럼 여겨지게 하는 놀라움과 감동의 연속이다.

 

결혼한 지 40일 정도 되면서부터 홀시아버지를 모셨고, 별세하실 때까지의 17년 동안 한번도 불만감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한다. 오히려 시아버님과 아주 재밌게 살았다는 기억이 남는다고 한다. 4살 때에 어머니를 여읜 남편은 3남1녀 중의 막내로서 위로 누님 한 분과 형님이 두 분 계심에도 아버님을 모시게 된 이유는 시아버지께서 유독 이 막내아들과 코드가 잘 맞아 마음이 편하시다는 것과 막내아들이 아버님을 모시고 싶다는 것이 전부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님을 모시고 와야겠어요.”라는 남편의 통보를 받고 이제 갓 스물넷의 어린 신부로서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만 알고 수용하게 되었고, 바른생활 교과서 같이 반듯하고 빈틈없는 남편의 말씀인지라 더욱 아무 군생각도 없었다고 한다.

홀시아버지를 모신 이래로 작고하실 때까지 17년 동안 하루 세 끼 식사를 따뜻한 밥으로 지어 올렸고, 오첩반상을 기본으로 하여 같은 반찬을 이어서 드린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밥과 찬의 양을 잘 조절하여 가능하면 제때제때 수요가 되도록 애썼지만 더러더러 밥이 남게 되어 여차하면 새댁인 정 여사는 식은 밥을 드시기 일쑤였다 한다. 그것도 양 조절의 센스가 부족한 자신을 탓할 지언정 식은 밥 차지에 대한 불만스러움은 안 느꼈다고 한다.

시아버지께서는 막내아들 집으로 오신 이후 집안의 기제나 행사가 있을 때에 큰 아드님 댁엘 들리셨다가 아무리 밤이 깊어도 막내아들 집으로 오셔서 주무셨다고 한다. 정 여사님은 그것을 회고하면서도, “아버님께서는 참 지혜로우셨어요. 너무 늦으시면 주무시고 오실 수도 있지만 제게 조금이라도 틈이 생겨 딴 마음이 생길까봐 아예 그러신 것 같아요. 어차피 저희가 모실 바에야 당연하게 여기며 담뿍 복된 마음으로 모시는 것이 좋을 터, 아버님께서는 섬세하게 그 복된 마음챙김을 도와주신 것 같아요.”라고 말씀하시는 여인이다.

어르신께 뿐만이 아니라 두 아들을 둔 어머니로서도 거의 만점이시다. 나란히 연년생을 낳아 기르면서 애들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애들의 귀가 시간에 집에 없었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애들이 올 시간에 맞추어 초등학교 때에는 따뜻하고 싱싱한 간식을, 중고교 때에는 식사를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고, 어르신 모시는 일이나 애들 챙기는 일, 남편 뒷바라지하는 일들 모두 너무나 행복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정 여사님은 또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이 대단하시다. 근 30년을 살아온 부부임에도 아직 신혼과 같은 모습으로 함께하고 계신다. 곁에 있어도 연신 설레는 듯한 미소와 정성으로 바라보는 눈빛 하며, 입만 여시면 남편에 대한 찬탄과 남편에 대한 절대 신뢰의 섬김 등 양처(良妻)의 덕성을 고루 갖추신 참으로 아름다운 부인이시다.

남편은 50대 중반으로서 충북 충주의 산골에서 상경하여 한국 최연소 세무고시 합격자 세무사이다. 집안 대소가의 큰 자랑이 되기도 했거니와 마을 주민들의 경사이기도 했다 한다. 천성이 선량하고 반듯하며 좋은 정신까지 갖추신 분이셔서 형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집안의 조카 및 먼 친척들, 나아가서는 고향 동리 이웃에까지 그 부부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할 정도로 작선(作善)을 일삼아 오셨다 한다. 식구 외의 인원이 함께 와서 밥 먹고 잠 자는 일은 허다하고, 여차하면 누구누구 장학금에다가 정성 다해 주변의 경조사 챙기는 일, 심지어 주변인들의 병원비 후원하는 일 등 선한 일 바른 일이라면 재고할 겨를도 없이 실행해 오신 남편을 따라 묵묵히 섬겨온 여인이시다. 그것이 바른 일이니까, 그것이 좋은 일이니까, 무엇보다도 존경하는 남편이 하자 하는 일이니까 무조건 함께 해 왔다는 말씀이 어찌도 가슴 뭉클한지 절로 마음이 낮아지게 하였다.

 

어르신을 모시고 사는지라 사방 막힌 아파트 공간에서 여름날 아무리 더워도 얇은 윗도리나 반바지 한번 걸치지 못하고 항시 엄전하게 갖추어 차려입고 있어야 했으며, 때로는 먼 미래를 생각하며 좀은 아끼고 싶기도 했지만 완고하게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행하시는 남편의 선행에 아주 조금만 멈칫해도 많이 부족한 사람처럼 여겨지는 부끄러움을 느껴왔고, 무용을 함께했던 벗들의 성공적 소식들에 잠시잠깐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도 했었지만, 어린시절부터 괜찮은 경제 살림 속에서 학과 공부와 무용 밖에 모르고 설거지 한번 안 해보고 시집온 공주과 출신의 정 여사님이 이 많은 사람들을 보살피고, 이 많은 일들을 치루어 내면서도 불만을 하기보다는 남편보다 못하지 않으려고 경쟁하며 용을 쓰고 따라하기 바빴다는 이야기 등은 마치 18세기 옛 여인의 삶을 방불케 했다. 강남에서 세무사 업을 하는 댁치고는 집안의 세간 또한 상상이 불가능하다. 20년 전 입주해 사는 아파트, 그때 들여놓은 장롱, 침대, 냉장고, 오븐 등 모두 골동품 전시장처럼 여기게 한다. 검소함이 어떤 것인지, 조촐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곳이다.

그러다가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아들 둘 대학 들어가고 나서야 대학원에 진학, 무용을 다시 시작하여 석사 박사 학위도 마치고 미친 듯 죽고 없는 듯 열심히  연습하고 정진하여 강단에도 서게 되고, 개인 및 단체 무용 발표회도 더러 가지며 명실공히 명무인(名舞人)으로서의 발판을 세우셨다.

 

정 여사님에게 있어서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했던 요인들이야 많기도 하겠지만 가장 대표가 될 만한 중대 요인이 있다면 무엇이겠는가 하는 내 질문에 호리의 주저함도 없이 나온 대답은 ‘어머니’였다. 정 여사님 어머님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살아오신 모습이 눈과 귀와 가슴에 알알이 박혀있는 듯, 그대로 따라 살고 있더라는 것이다. 삶의 매 순간에,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에, 간혹 자신의 힘에 부쳐 꾀가 부려지는 순간에는 더욱, “이럴 때에 내 어머니는 어떻게 하시던데....” 혹은, “이럴 때에 내 어머니라면 어떻게 하실까?”하고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는 것이다.

“어머니께서 한 평생 삶의 모습으로서 제가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다 알려주신 셈입니다. 그것이 어머니께서 제게 주신 귀하디귀한 유산입니다. 어머니만 떠올리면 인생이 겁나지 않습니다.”라고 나지막이 말하시는 정 여사님의 고아한 얼굴이 마치 그 어머니 얼굴일 것이라고 짐작하게 한다. 그리워하며 닮아간 저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처럼.

 

유산은 다음 세대의 자산이다. 그 자산으로 더 큰 살림을 늘려가게 될 것이다. 정 여사님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유산은 윗대의 삶의 모든 모습에서 이미 건네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큰 재산이나 아름다운 문화를 남겨준다 한들 후손이 그것을 관리할 역량과 인격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얼마지 않아서 흩어져 없어질 수도 있다. 어쩌면 남겨주지 않음만 못한 예들도 우리는 더러 본다. 자손들의 행복한 삶을 위한 가장 의미 있는 유산은 바르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 지혜롭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이미 내려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바르고 행복한 삶, 지혜롭고 아름다운 삶의 방법 하나로 동사섭 문화에서는 5대 원리를 권장한다. 정체(正體), 대원(大願), 수심(修心), 화합(和合), 작선(作善)의 덕성을 안내한다. 이 5대 원리의 덕성이 각인의 몸에 배고, 주변에 두루 전해지고, 후예들에게까지 내려지도록 문화운동을 펴고 있다.

30년 가까이 동사섭 수련을 안내하면서 세월 갈수록 더 많은 부족함이 느껴진다. 젊은 나이 때를 뒤돌아보며 일찍이 선생노릇 한 것들을 부끄러워한다. 자신의 내적 다루기의 심도를 더하기 위해 긴 휴가를 내어 홀로의 정진 시간을 가지면서, 정 여사님의 몸에 밴 어머니의 유산을 명상하며 내 속에 은근히 밴 내 부모님의 좋은 유산들도 음미해보면서 좋다. 승려 신분으로서 내 유산을 내려줄 자손은 없지만, 공인(公人)된 입장에서 나의 모든 행동거지가 후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유산이 될 수 있도록 살아보자는 진중한 다짐으로 한 여름 복더위를 가누어본다.

 

 

2008년 7월을 보내며

명상의 집 : 대화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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