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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컬럼

NO1작성일 : 2015-11-11 오후 10:42
제목
90. 상식중의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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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1s (1)

 

<상식 중의 상식>

“불교의 목적은 이고득낙(離苦得樂)입니다. 그러나 이 이고득낙이 어찌 불교의 전유물이어야만 하겠습니까? 고통을 벗어나 행복을 누리는 것, 그것은 전 인류가 전 역사에 걸쳐 추구해온 목적입니다. 불교는 도그마가 아닙니다. 불교는 그냥 상식입니다.”

내 생애 첫 수련의 첫 강의에서 듣게 된 이 말씀으로 아마도 동사섭과 나의 인연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40대 초반부터 불교에 관심이 생긴 나는 이 책, 저 책, 그저 내 손에 들어오는 대로 불교 서적을 읽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절에 간다거나 스님들의 법문 자리에도 그다지 발걸음을 하지 않았던 까닭은 특정 종교에 속하는 게 어째 부담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종교’라는 단어가 ‘구속감’이라는 느낌을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아무 때나 아파트 초인종을 누르고는 열렬한 선교 말씀을 쏟아내는 ‘신도님들’ 덕분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쨋거나 혼자 잘난 체하며 20 년 가까이 책장만 뒤적이다 더 이상 나갈 수 없는 한계에 부딪쳐 찾아간 첫 번째 수련장이 함양의 동사섭이었다. 그 첫 날, 강사 스님이 등단하셔서 불교는 어떤 특정한 교리가 아니라 전 인류가 행복이라는 길을 더듬어 나가는데 도움이 되는 상식이라는 말씀을 해주시니 당장에 숨통이 트였다. 그러나 ‘상식’이라는 말씀은 완전히 납득되지 않았다. 불교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내 자신 불교 책을 읽으면서 한 쪽으론 무언가 알 것도 같은데 돌아서면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런 세월을 보내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불교가 상식이라는 말씀이었다.

동사섭을 만난 지 3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저 구름 위의 신비하고 고상한 말씀으로만 여겨지던 불교가 점점 구름 위에서 내려오더니 말씀 그대로 상식이 된 것이었다! 때리면 아프다는 것과 같은 당연한 이치, 구태여 불교라는 이름을 붙일 것도 없는 그런 이치, 정말 불교는 그냥 상식이었다! 그런데 세상에 태어나 육십갑자가 한 바퀴 돌도록 나는 어째서 이 상식을 모르고 있었고 또 그 상식이라는 불교가 왜 그다지도 알쏭달쏭하게만 여겨졌던 말인가. 이유는 단 하나, 내가 열쇠 구멍보다 작은 사람이라는 구멍, 그 사람 구멍 중에서도 작고 작은 <나>라는 구멍 속에서 시선을 코 앞 땅바닥에 고정시키고 뱅뱅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늘구멍 속에서 무한 우주를 어찌 이해했을 것인가. 제 딴엔 무언가 하노라 했어도 그 노릇이 어거지가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로마에 살면 로마의 상식을 따라야 하고 우주 속에 살고 있으면 우주의 상식을 따라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 <나>는 이 불완전한 인간의 감각기관에 잡히는 것들을, 인간의 혀가 발음하는 온갖 단어들을, 절대 진리로, 유일무이한 것으로 믿으며 우주의 상식에 대해선 깜깜 절벽이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우주의 구성 입자인 동시에 지구의 주민이며 그 중에서도 사람이고 또 그 중에서도 21 세기 대한민국의 환갑 넘은 아줌마이다. 그러나 이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예순이 넘은 대한민국 아줌마의 시선을 바탕으로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우주적 시선이 바탕 되어야 할 것인가. 그 답은 너무도 자명하다.

동사섭에서의 3 년. 그것은 인간의 상식이라는 틀로부터 고개를 쳐들고 우주의 상식을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우주의 상식이라는 것이, 하느님의 상식이라는 것이 그렇게 유별난 게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는 나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모든 일에는 그 일을 일으키는 원인이 있다는 것, 모든 존재는 지금 이 찰나에도 끊임없이 변하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하늘이니 땅이니 하는 이름이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붙인 것이라는 것, 또한 좋고 나쁜 것도 당초부터 그런 게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각자 그저 그렇게 판단할 뿐이라는 것, 그저 그런 것들이 우주의 상식이었다. 알고 보면 우주의 상식이야 말로 상식 중의 상식으로 이 무한 세계 세세골골에서 통용되는 보편적이고 보편적인 상상상상상………상………상식이었다. 더 없이 단순하고 더 없이 명쾌한 상식, 그야말로 불을 보듯 환한 것이 우주의 상식이었다.

“비불교가 불교입니다. 불교는 특정하게 만들어진 교설이 아닙니다. 불교는 그저 이 세계에 있는 이치들을 발견해낸 것뿐 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존재계의 그런 이치들을 잘 이해하게 하여 존재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나의 스승은 그렇게 말씀하신다. 오불꼬불하고 기기묘묘하고 애매하기 짝이 없는 주관성에 물든 이 <인간 나>의 상식이 아니라 만인에게, 무한 세계의 모든 존재에게 공평무사한 우주의 상식을 이해하고 그 순리대로 살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의 상식이 그 순리에 바탕하여 운용된다면 그것 또한 우주의 상식이다.

우주의 주민인 나무는 아무런 사심 없이, 그저 나무의 역할을 하며 산다. 나무에게는 자기가 지구의 생명들에게 산소를 공급한다는 생각조차 없다. 나무는 본인이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그냥 보살행일 뿐이다. 이것이 우주의 주민들이 우주의 상식에 따라 사는 모습이고 이것이 우주의 주민이 누리는 지극한 행복이다.

글. 선혜님(yousorim@korea.com)
그림. 자두님(handglass6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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