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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후기

NO1작성일 : 2015-11-13 오후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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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2014년 12월 정기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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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정기강좌>

'집착'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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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복습을 하셨습니다. 나이 70이 넘어 인류에게 한 마디만 뱉고 가라 한다면 무엇을 뱉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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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이전에는 ‘그냥 있는다’였습니다. 물론 그것이 묘각입니다. 그러나 70 이후로는 ‘지금 바로, 그이한다’로 바꿨다십니다. 왜 ‘그이’라고 했느냐 하면 다른 종교인을 배려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교인은 ‘부처’라 하는 것이 마땅하겠지요. 미국에서는 ‘그이’가 ‘예수’였다 하십니다. 지금 바로 그이하자. 지금 바로 예수처럼, 부처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자는 말씀이십니다. 이에 항의할 수도 있겠으나 그건 잘못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 말씀이 옳다 생각하실 것입니다. 이럴 때는 유보하지 말고 믿고 그냥 돌파하라 말씀하십니다. 납득이 안 될 때는 바로 믿으라십니다. 성자의 말씀은 바로 수용하라. 스님께서는 한 때, 도산 안창호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다십니다. 그러니 ‘지금 바로 그이하라’. 그러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경청부터 하면 된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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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에 따라 지금 그이로 결정해야 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을 초월하여 사, 언, 행하는데 조언을 한다면 지금 바로 행복하라십니다. 또 하나 지금 바로 해탈하라십니다. 금방 만날지, 금생에 못 만날지도 모르는데 상대가 나를 해칠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해탈하라십니다. 조사선에서 조사는 제2, 제3, 제4의 붓다를 이릅니다. 그 붓다의 제일의 가르침을 선이라 합니다. 그것이 곧 지금 바로 부처하라. 곧 지금 바로 자유하라십니다. 상대가 권총부리를 대고 있지 않는데 그것을 끄집고 들어오지 말고 지금 바로 자유하라십니다. 조사선은 장애가 없으니 지금 바로 자유하고 지금 바로 행복하면 된다십니다. 붓다로서 지금 바로 상황을 초월해 행복 해탈하라. 난 지금 무엇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 하는데 그것은 here & now에는 없는 것이다 하십니다. 지금 바로 행복 해탈로 임재하면 마음이 바로 밝아집니다. 그 에너지에 어떤 위협도 할 수 없다십니다. 그러니 지금 바로 그이하시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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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간단한 것인데 행복 해탈이 안 됩니다 하는데 그래서 스님이 필요하다십니다. 많은 사람이 아무 것도 아닌데 죽겠다 합니다. 조사선을 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보살도는 아라한도에 비해 복잡합니다. 보살도를 할 바에야 제대로 해야 합니다. 행복 해탈로 넘쳐 사바세계를 걸어가라 하십니다. 세상 중생들을 해결하기 위해 여기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보나, 보살도로 보나 ‘바로 지금 그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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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으로 이야기를 옮기셨습니다.
집착! 집착은 간단합니다. 집착은 대상이 전제됩니다. 즉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돈이거나 사람이 있어야 집착하게 된다십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집착이 있게 마련입니다. 대상을 설정하면 그것은 집착입니다. 말의 뜻을 선명히 알아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집착하면 마음이 괴롭다십니다. 금덩이가 있다면 여러 사람이 집착하며 인간 간 갈등이 일어나 싸움, 전쟁이 됩니다. 그것은 악마이고 지옥이며 관계의 전쟁을 만드는 것입니다. 99%가 그렇습니다. 1%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고상한 철학이 있다면 아닐 수 습니다. 즉 집착이 선일 경우가 있습니다. 집착하는 마음을 놓으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집착 상황에 있다면 그 상황에서 회향만 잘하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집착 자체가 끝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무위법 차원에 보자면 집착이라는 말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번뇌 즉 보리로 본다면 선도 악도 아닙니다. 집착은 99% 전쟁과 지옥을 끌어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그렇습니다. 현실적으로 다루면 집착이란 불교에서 매우 깊이 다룹니다. 보리수 하에서 부처께서 큰 깨달음을 얻으셨는데 그것을 우리가 얻으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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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는 다른 사람도 다 깨닫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고 녹야원으로 가시기 전에 5비구를 위해서 메시지를 전할까 구상하셨는데 그것이 즉 불교의 핵심인 사성제 12연기 8정도라는 가르침이라십니다. 이론체계,실천체계입니다. 여기에서 많은 것이 하나의 교리 속에 다 들어가는데 그것이 사성제입니다. 12정도 8정도는 사성제 속에 다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사성제를 이해해야 만학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사성제 속에서 집착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성제는 무엇인가. 사성제는 고집멸도입니다. 고집멸도는 인류 전 역사에 모든 문화 문명은 고집멸도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고는 무엇일까요? ‘고’는 괴로움입니다. 움직임은 ‘고’ 때문입니다. 근본적 괴로움이 사라지면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즉 움직임은 괴롭기 때문입니다. 그 괴로움은 폭이 넓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다 싶습니다. 더 건강했으면, 돈이 더 많았으면, 더 잘 생겼으면 하는 괴로움이 실존적으로 내 안에 있습니다. 이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구원이라, 락이라, 해탈이라, 멸이라 합니다. 이 멸은 고가 사라졌다는 말씀입니다. 고집멸도에서 고에서 멸지향 의지를 갖게 되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빠르게 멸로 갔으면 좋겠지만 걸림돌로 박혀있는 것이 있는데 그게 ‘집’입니다. 모을 집. 이 집이 가로 막고 있어 멸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집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고가 멸로 확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행복을 가로 막는 것이 무엇인가 확연히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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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의 목적은 고가 사라지고 락이 되는 것입니다. 원효스님은 ‘증사작반’이다 하셨습니다. 솥에 모래를 넣고 불을 때고 있는 것입니다. 모래를 쌀로 보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니 최소한 마음공부에 필요한 기초지식은 알아야 합니다. 즉 조사선은 인류역사상 가장 강력한 가르침입니다만 조사선은 답답할 수 있습니다. 교과서 없이 진리를 뚫어야 하는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만일 조사선의 요령을 알기만 하면 천하에 쉬운 것인데 이것은 8000만불 복권 당첨보다 어렵습니다. 이것이 어려우니 최소한의 인문학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즉 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쉽게 이해하자면 왼손에 수첩이 있지요? 수첩을 보면서 ‘있다’ 그러시지요? ‘있다’하는 것이 ‘집’입니다. ‘집’은 단순구조가 아니라 복합구조입니다. 있다는 것이 집착의 시작인 것입니다. ‘있다’는 존재 부여입니다. 바로 여러분은 가치부여를 합니다. 즉 ‘좋다’ 그럽니다. 가치평가를 하는데 그것 또한 집에 들어갑니다. 무엇이든 보면 존재 부여부터 합니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특히 미성숙한 사람일수록 가치부여를 합니다. ‘좋다, 나쁘다’ 그럽니다. 그러면서 ‘있다-좋다’ 그럽니다. 그 안으로 끌어당기는 마음이 나옵니다. 그것을 ‘싶음’이라 합니다. ‘있다-좋다-싶다’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성취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므로 ‘썅’합니다. 속이 상한 것입니다. 즉 ‘있다-좋다-싶다-썅’ 그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집의 내용입니다. ‘싶다-썅’을 반복하게 되는데 다이어트로 예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내 마음 속에 ‘있다-좋다-싶다-썅’이라 해놓고 ‘싶다-썅’하면서 불만사고가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집이란 아예 불만사고라 생각해 놓으면 이것이 집이 됩니다. 평소 생활 속에서 ‘있다-좋다-싶다-썅’ 불만을 많이 해왔는데 거기에서 벗어나면 됩니다. ‘싶다’를 알맹이로 하는 것이 집착입니다. ‘싶다’를 집착의 대표로 생각하는 것은 ‘있다, 좋다’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나 ‘싶다’는 욕심으로 아픔을 불러 온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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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다’가 현실적으로 가장 알맹이 번뇌에요. 그러니까 집착을 이해하려면 개념적으로는 ‘싶다’지만 내용은 ‘있다-좋다-싶다-썅’의 번뇌인 것이지요. 번뇌를 복잡하게 얘기하려면 108번뇌입니다. 압축하면 3독이지요. 탐, 진, 치. 그 중 탐이 가장 현실성이 높고 그것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당위론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 왜 하느냐. 그것은 고를 소멸시켜 락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락은 고의 멸진입니다. 마음은 한정 없이 자유롭고 좋습니다 그것이 멸로만 얘기하면 소극적이니까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소극적인 표현은 ‘차정문(遮情門)’이라 하고 락과 같은 적극적인 표현은 ‘표덕문(表德門)’이라 합니다. 지금부터 우리의 당위론은 고멸이 되기 위해서는 집을 소탕해야 합니다. 이것을 소탕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있다-좋다-싶다-썅’을 정화, 지양시키려면 그것을 따르면 됩니다. 화두선, 염불선, 옴마니반메훔, 금강경 등 법이 있을 수 있으나 여기에서는 이런 것을 권장하기도 하나 ‘있다-좋다-싶다-썅’을 씻어버릴 방법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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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시고 강의 2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유인물을 보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가 인문학에 관심을 두고 여기에 오는 것은 반기지 않습니다. 붓다가 되어 행복 해탈하자는 생각으로 오면 좋은데 지식욕으로 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인생은 급합니다.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빨리 내 마음을 심화시키고 확장시켜야 합니다. 다음 세상이 없다 하더라도 이 몸뚱이가 있는 한 행복 해탈로 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다음 세상이 없다 확실히 느꼈다면 승려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 세상이 있고 그 다음 세상이 있다는 것이 확신으로 왔었습니다. 그러니 최선의 삶이 마음관리였던 것입니다. 마음 관리를 하는데 최고 시스템은 조계종 스님 시스템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조계종 승려로 산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나는 몇 년 살다 죽으면 미국에 가서 태어나고 싶습니다. 지금 내가 펼치는 법이 미국과 맞아 떨어집니다. 미국이 괜찮습니다. 그러나 스위스의 알프스를 갔는데 어찌나 깨끗하고 청량감이 있는지 살고 싶어졌습니다. 한국이 천국인줄 알았는데 미국에 갔더니 습도가 극락이어요. 뉴멕시코, 달라스를 가봤는데 여름에 매우 더우나 습도가 없는 더위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극락이었습니다. 아무리 더워도 살짝 그늘진 곳으로 가면 아주 좋아요. 다시 태어난다면 미국이다 생각했는데 스위스에 갔더니 거기가 더 좋았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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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우리 인간이 영성적이 존재로 태어났다면 열리고 열려서 해탈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유철학으로 살면 좋습니다. 자비는 그 다음입니다. 자비 이전에 자유로워야 합니다. 자유롭게 살게 하고 싶은데 그 길을 전하기로 좋은 땅이 그나마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을 처음 가 1,2년 지내고 보니 미국 사는 것은 칸막이가 없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에는 승려문화가 없어 걱정입니다만 그곳에 승려 문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아무튼 다음 세상에 미국에 태어날 것입니다. 혹 미국이 아니라면 그 다음에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습니다. 참 용한 나라입니다. 다만 통일되지 않은 것이 답답합니다만. 내가 200개 이상 나라를 암기하는데 작은 나라가 둘로 나뉘어 답답합니다. 이북은 너무 못 살아서 자존심이 상하기도 해요. 통일문제는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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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지간 석가모니의 깨달음에 대해 관심을 가져라십니다. 이유는 마음에 대한 지침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지성차원에서 가장 큰 지침이 제2, 제3 제자로부터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본 교과서가 사성제 12연기 8정도입니다. 이 중 사성제가 만학(萬學)의 표본입니다. 모든 것이 사성제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성제, 즉 코끼리의 발자국과 같이 큰 발자국 안에 호랑이, 늑대, 사람 발자국을 안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성제를 명상하세요.매우 좋습니다. 고집멸도, 사성제를 이해해야 인생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집이 고멸을 방해하는 심리요소입니다. 집의 내용을 보면 ‘있다-좋다-싶다-썅’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집이 집착이자 집의 에센스 개념이 집착인 것입니다. 즉 집을 알아야 집을 타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념이전의 실체사고로 추락해 들어갑니다. 내 눈 앞에 대상으로 나타난 것들이 많지요.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이 많습니다. 즉 마음의 주체가 대상을 규정하게 됩니다. 내 마음이 안이비설신의 생성향미촉법의 대상을 마주치면서 주관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마음이 안이비설신의, 생성향미촉법의 대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그것은 마음 내용입니다. 불교에서는 유식철학이라 합니다. 물건은 마음 밖에 있는 것이라 알고 있는데 그것은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 조금만 분석하면 밖에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것이 어떤 수준에 있다가 그것이 끊어지며 윗 수준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하나의 장벽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용수보살로부터 1세기 후, 세친이라는 분이 ‘유식무경’이라 말씀하셨는데 이해하는데 힘쓰는 불교학자들이 있다. 원리는 단순한 듯하나 복잡합니다. 세친의 ‘유식무경’과 같은 것에 명상을 하면 할수록 물건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내용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마음이라 생각하면 마음의 평화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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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친을 찬탄하는 시를 써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줄 써놓고 막혀 못 썼어요. 오 세친! 세친의 ‘유식무경’ 정도는 알아야 벌레과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지요. 칸트의 물자체 사상과 세친의 ‘유식무경’과 같은 것이지요. 소박실재론자는 눈에 보이는 대로 보는 것입니다. 대학 은사인 서동익 박사가 독일에서 와 뱉었던 한 마디가 세월을 통해 잊히지 않습니다. 물건이 밖에 덜렁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밖에 있을 만한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물자체다. 그것은 무엇이냐. 불가지다. 그것은 없는 것이냐. 그렇다면 있다는 것이냐. 그렇다고 있다고도 할 수 없다. 물자체는 밖에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내가 대학 2학년 때 그것을 뚫었다는 것입니다. 색즉시공입니다. 밖에 있다 믿는 것, 소박실재론자는 벌레와 다를 것이 없다 하셨습니다. 처음엔 안 좋았으나 내가 그 언저리를 깨닫고 보니 세상 사람들이 너무 엉망으로 살고 있는 것이 보였다는 것, 전쟁 일으키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 그것은 벌레만도 못한 것이지요. 복잡한 욕구기제가 있어 총칼로 사람을 죽이니 벌레만도 못한 것인 것이지요. 사고방식이 마인드의 지혜체계가 없는 것이 있다 생각하니 벌레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밖에 있는 물건이 정말 있느냐는 것이지요. 밖에 없다는 것이 확연해지면 개념권에서 개념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 의식이 개념이전으로 돌아가는 것, 동양철학으로 말하면 무극, 태극, 태허라 할 수 있습니다. 태극은 내 의식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니르바나를 어디에서 경험할 것이냐. 의식 속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실체사고가 집착의 시작입니다. 가치사고로 추락하면 욕구라는 심리현상을 빚어내는데 그 과정이 마음대로 안 되면 상하면 그것이 분노입니다. 즉 썅입니다. 욕구-분노를 반복하다 보면 하면서 세상 어렵다며 세상 일반에 대한 불만족스러운 느낌과 생각을 갖게 됩니다. 특히 감각적인 사람이 더 느낍니다. 그러면 불만사고는 가치사고를 더 부추깁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정되지 않고 가치가 더 빛나게 되면 가치사고가 실체사고를 부추깁니다. 소유하려 해도 안 되니 더 값지게 보이니 더 강렬해집니다. 가치사고 치열해질수록 욕구는 집착세계로 발달합니다. 있다 좋다 싶다 썅이 순환하면 확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탐진치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즉 어리석음입니다. 욕구는 탐과 같고 분노는 진이고...치탐진 삼독을 없애자고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을 막연히 생각말고 있다 좋다 싶다 썅의 불만사고로 자기 속에서 읽어보시고 미성숙한 마음을 정화하자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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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를 없애자고 하는 것이 도입니다. 그것은 길입니다. 탐진치를 제거하는 도입니다. 불교쪽에서는 부처님 당시에는 8정도라 했습니다. 여덟까지 덕목 중에 1번이 정견입니다. 바른 견해, 바른 가치관입니다. 바른 가치관 정립부터 해야 합니다. 바른 가치관 정립은 도를 통했다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신만 있을 뿐이지 경계란 있을 수 없다. 도통한 사람은 믿음이 아니고 이성적 확신입니다. 바른 가치관 정립부터 해야 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얘깃거리가 됩니다. 장자의 무유별시가 한 답이 될 수 있습니다. 가치관 정립과 관계됩니다. 존재하는 세상에 대해 지인론을 폈습니다. 세상은 없다라고 고개 끄덕이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정밀해질수록 세상은 텅 비어 있습니다. 그런데 장자는 전자현미경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세상은 텅 비어 있다 했습니다. 그 다음 경지에 이른 지인은 세상은 유이기는 한데 구별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무와 유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양면 중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자는 차정문쪽에 손을 들어줍니다. 유는 허무가 아니다 합니다. 세상을 유라하되 구별하지 않아야 두 번째입니다. 별은 남녀 등 존재론적인 구별입니다. 존재론적으로 구별은 두더라도 가치론적으로 시비를 하지 않아야 세 번째 단계의 지인이다는 것입니다. 무로 보나 유로 보나 별로 보나 다 지인 단계입니다. 세상을 보면서 밉다 곱다가 없어지고 여여실상으로 살기에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자비로 봅니다. 그 다음 장자의 말, 세상을 바라다 보면서 시비에 떨어지면 구제불능입니다. 장자의 말을 떠올려서 구제불능에서 벗어나십시오. 내가 무유별시라 붙였습니다. 그러면 집착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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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불교해서 동사섭. 집으로부터 깨끗이 벗어나기 위해서 ‘돈망’ ‘지족’ ‘비아’ ‘죽음’ ‘나지사’ 명상의 다섯가지로 되었습니다. 돈망은 주바라밀이고 나머지는 조바라밀, 중급과정, 고급과정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하고 인연되었을 때 돈망을 뚫으십시오.그냥 있는 것이 돈망입니다. 뚫었다 하게 되면 이 세상에 나온 최고의 밥값을 했다 하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here and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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